윤재승 (1987-?)
외가를 비롯한 자신의 외조부의 사돈댁의 배려로 인하여 1936년에 첫 결혼을 하여, 1938년에 득녀하였고 1941년에 득남하였으나, 첫번째 결혼 8년여만이던 1944년에 첫번째 부인을 병으로 상배한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로 결국, 1944년 공산주의(조선공산당)에 투신하여 1945년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후, 1946년 김해숙(金海肅)과 재혼하였으나, 이듬해 1947년 4월 19일,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중구 장충동에서 사살되었는데, 그에 관련하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시절에 김두한(金斗漢)과 함께 활동하였었던 주먹이었다고 하며, 1945년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후 좌익 계파 어용 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청년전위대)에서 전위대 정치 깡패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좌익 단체가 주최한 '청춘의 봄'이라는 연극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던 중에 대한민청 감찰부장 김두한과 그 부대원들에게 전격 기습되었고 결국 대한민청 본부로 끌려가 사살되었다(시공관 사건).[1]
아래는 용의자로 구속된 김두한을 조사한 미군정의 수사 기록이다.
“ | 정진룡과 그의 무리들은 이승만을 사기꾼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방하는 팜프렛을 배포하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4월 20일, 김두한은 이 시점이 그의 오랜 친구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부하들을 보내서 반 이승만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오게 했다. 김의 부하는 극장과 서울의 시장거리를 배회하면서 정과 그의 부하를 잡아들였다. 김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은 길고 단단한 일본 단풍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행해졌다. 정은 박헌영 부재 시 남로당의 대표였던 허헌에게서 명령을 받았다고 했고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에 김이 이성을 잃고 정의 가슴을 찼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에게 철회를 요구했지만 정은 거절했다. 김은 또 한방을 더 때렸고 그것으로 인해 정은 체내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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